아서 클라크에 대한 헌사 - 기동전사 건담 00 영화/드라마

아서 클라크와의 만남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인적인 잡담을 좀 늘어놓자면, 아서 클라크는 SF 빅 3 중에서 가장 늦게 접한 작가였습니다. 세 거장의 작품 중 가장 처음 접했던 작품은 로버트 하인라인의 『Gulf』였고, 아시모프의 『200살을 맞은 사나이』와『로봇』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번역 출간된『파운데이션』시리즈가 본가 책장에 진열되어 있을 만큼 한 때는 SF소설에 열광하던 시기가 있었네요.

아서 클라크를 접한 것은 중학교 진학 이후였습니다. 하이텔의 한 애니 토론방에서 에반게리온이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글을 읽고 곧장 학교 도서실을 찾아갔죠. 문제는 저희 학교가 막 신설된 학교여서 아서 클라크 책이라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SF라곤 로빈 쿡 의학소설 밖에 없었던 동네 대여점에도 아서 클라크 작품이 있을리 만무했고, 마침내 시립 도서관까지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야 그의 작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만 해도 에바의 영향력이 엄청났던 시기인지라 소설을 읽어도 에바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등 작품의 온전한 감상에는 실패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학교에서는 -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 '능력자'로 대접받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EVANGELION이 Eve + Angel + Lion 의 합성어라든가, 사해사본이 실제한다든가 그런 식의 이야기만 오가던 시점에서 '뭔가 있어보이는' 『유년기의 끝』이란 소설을 인용하며 인류보완계획 내용을 설명했으니까요. 요즘 관점에서는 그게 무슨 오덕짓이냐 하겠지만, 당시 에바 열풍을 리얼타임으로 접한 세대라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가실겁니다. 중학생도 아직 TV 애니메이션 챙겨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애니메이션의 분석을 위해 만나게 된 아서 클라크의 작품 세계는 그전까지 알던 SF 작품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습니다.『유년기의 끝』을 시작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시리즈와 『라마와의 랑데부』를 탐독했고,『낙원의 샘』은 책이 너무 마음에 들어 서점을 뒤져 새 책을 구입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이듬해 『드래곤 라자』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제 관심분야는 SF에서 판타지로 넘어갔지만, 하인라인과 클라크의 작품은 사춘기의 제게 큰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습니다.


기동전사 건담 OO에서 아서 클라크를 만나다

지난 해 이맘 때 쯤 시대의 거장 아서 클라크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휴학중이었던 저는 클라크 타계 기사를 읽고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감상해볼까 하여 학교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도서관에 앉아 소설을 읽던 저는 문득 그의 작품이 매우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 그랬겠거니 했는데, 묘하게도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구체적인 장면이 머리속에 그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읽은 후에 깨달았습니다. '아.. 더블오였구나' 하구요.

정확하게 말해서 머리속에 그려진 작품은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와 『총몽』이었습니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이『낙원의 샘』이었는데, 이 책에는 궤도 엘리베이터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총몽에서도 이 컨셉이 도입되었고, 더블오는 아예 작품의 가장 중요한 설정 중 하나가 바로 이 궤도 엘리베이터니까요. 처음 더블오를 감상할 때만 해도 아서 클라크까지 생각이 미치진 못했었는데, 아마 클라크 책을 손에서 놓은지 너무 오래되었거나, 궤도 엘리베이터라는 아이디어가 더이상 특별하고 기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한 번 아서 클라크에 생각이 미치자 더블오라는 작품 자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현대 과학기술로는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술(=태양로와 건담)을 지닌 세력(Celestial Being)이 등장해 전지구의 세력을 하나로 규합시킨다. 그들은 전쟁과 분쟁의 근절을 위해 무력개입을 불사한다. 그러나 계획의 진의, 최종 목적지는 본인들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라는 1기의 전체 스토리 라인은 『유년기의 끝』을 살짝 뒤튼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혹시나해서 찾아보니 역시 북미쪽 블로그를 중심으로 - 일본 웹쪽은 일어가 안되는 관계로 검색불가..- 아서 클라크의 이름이 심심찮게 언급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때 까지만 해도 저는 2기 스토리까지도 『유년기의 끝』과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장담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류 의사의 통합과 진화,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력도 불사'라는 소재는 최근들어 너무 반복적으로 소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넓게 보자면 『코드 기어스』나 『마크로스 프론티어』도 이러한 대주제를 풀어냈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설마 여기서까지 주제를 반복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유년기의 끝』의 오버로드와 더블오의 셀레스철 빙의 존재가 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버로드와 오버마인드, 이노베이드와 이노베이터

2기가 시작되고 '이노베이터'라는 세력이 전면에 부상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설마했던 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최종보스로 자리매김한 리본즈는 여러면에서 『유년기의 끝』의 카렐렌 총독을 연상시켰고, 1기에서 오버로드의 역할을 수행했던 셀레스철 빙은 180도 성격이 바뀌어서 카탈론과 함께 '자유주의 연합'같은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0화 쯤 진행되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이제는 과연 원작과 달리 '악의 집단'으로 묘사된 이노베이터(오버로드)들과 셀레스철 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지, 인류의 미래도 종말을 맞이하게될지에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아마 아서 클라크 세계관과의 연관성을 눈치채신 분들이라면 모두 비슷한 관점에서 2기 후반부를 감상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품 종반부에 이르러 이오리아 슈헨베르그의 진정한 계획이 드러납니다. 그는 머지 않아 다가올 인류와 외계존재와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을 동원해 인류를 한 단계 진화된 존재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베다와 '이노베이드'들을 만들어 전인류가 '이노베이터'로 각성하는 것을 돕도록 했습니다. 리본즈는 평범한 인류가 각성하여 이노베이터로 진화하는 것을 돕기 위한 '이노베이드'로 만들어진 존재였으나, 스스로를 다른 이노베이드와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 이노베이터라 칭하며 다른 이노베이드들과 인류를 지배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창조주라 할 수 있는 이오리아의 뜻을 거스른 것이지요.

이는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을 절묘하게 오마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클라크의『유년기의 끝』은 거대한 UFO와 함께 지구에 도착한 '오버로드'의 통치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버로드를 지휘하는 카렐렌총독은 우선적으로 지구상에서 전쟁과 분쟁을 없애고 하나의 통합된 세계국가를 건설했고, 유토피아에서 살게 된 인류는 진보를 거듭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버로드의 통치는 사실 오버로드의 상위종이자 더 위대한 존재인 '오버마인드'의 의지였습니다. 오버마인드는 오버로드의 통치를 통해 인류를 진화시켜 인류가 오버마인드와 하나로 융합될 수 있도록 지시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버로드들은 개성과 자아, 자의식을 지닌 존재로서의 진화의 끝에 도달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미 모든 '가능성'을 상실한 그들은 결코 '오버마인드'가 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가능성의 결실을 맺은 인류를 부러워합니다. 더블오의 리본즈는 이러한 카렐렌 총독의 고뇌와 시기, 어두운 측면을 부각해서 만든 캐릭터인 셈입니다.

다시 더블오로 돌아와서, 순수한 이노베이터로 각성한 세츠나는 트윈 드라이브 시스템을 사용해 모든 인류와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는『유년기의 끝』에서 개체성을 상실한 단일체로서 진화의 종착점에 도달한 '인류 변혁의 결과'와는 다른 대답입니다. 티에리아의 마지막 대사처럼 미래에 대한 결정권은 인류의 것으로 돌아갔고, 최초의 이노베이터인 세츠나는 '다가올 대화'를 준비하며 변혁된 세계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억제력을 발휘하는 데 힘을 쏟는 것으로 엔딩을 맞습니다. 초월적인 존재로 각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모순된 존재로 남아 세계를 지켜본다는 점에서 지극히 일본다운 사고방식의 결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The Childhood of Humankind Ends

더블오에서 인류는 하나의 통합된 세계정부를 구축하는 것으로 '유년기의 끝'을 맞습니다. 그리고 이노베이터가 된 세츠나의 눈은 목성으로 향합니다. 목성! 스탠리 큐브릭의 명화『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디스커버리호가 향하는 곳입니다. 물론 소설 내용을 따른다면 세츠나의 목적지는 토성이어야 하겠지만, 오늘날『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라 하면 역시 책보다는 영화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 상징성도 더 크다고 할 수 있을테니 충분히 납득 가능한 범위입니다.

엔딩장면에서 작품 내용 전개와 전혀 무관해보이는 목성을 보여준 것은 더블오의 인류가 외계의 '미지의 존재'와 만나 대화할 시간이 머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아예 대놓고 The Childhood of Humankind ends라는 문구를 삽입해 확인사살 해주신 감독님의 친절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만 ^^;;

2010년으로 예정된 극장판이 편집판 수준에 멈출지 아니면 새로운 스토리로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건담 월드에 외계인이라니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네요. 과연 이오리아 슈헨베르그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는 200백년 이상의 미래를 내다본 선구자적 견해였음이 입증될까요? 아니면 단순한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과대망상으로 귀착될까요? 또한, 이미『유년기의 끝』을 다 써먹은 상태에서 이번엔 어떤 식으로 클라크 경에 대한 경의를 표할지도 궁금해집니다.


어쩌면 저는 더블오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큰 틀에서의 의도는 이해했다 하더라도 '애니메이션 자체'에 제대로 집중해서 보지 못했으니까요. 십여년 전 에바로 인해『유년기의 끝』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번엔 지나치게『유년기의 끝』에 얽매였던 것은 아닐까 싶어 살짝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타성에 젖어있다고 느껴왔기 때문인지, 의도적으로나마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더블오는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최고의 SF 작가 중 한 명인 거장중의 거장 아서 클라크의 세계관을 건담이라는 상징적인 애니메이션 세계로 끌어들여온 시도도 높이 평가할만하지 않을까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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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블오 'TV판'의 끝 (극장판의 전조) 2009/04/01 1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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